봉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말사(末寺)로 영장산(靈長山)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1028(현종 19)년에 창건하였으며, 그 뒤 폐허가 된 것을 1395(태조 4)년 태조의 명에 의해 담화(曇華)가 중수하였다. 1674(현종 15)년에는 현종(顯宗, 1659∼1674)의 딸 명혜(明惠)와 명선(明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주의 능 인근에 있던 이 절을 중창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역사를 맡은 승려는 금강산의 일축존자(日竺尊者)였으며 중창 후 ‘봉국사’라고 명명하였다. 1924년 두창(斗昌)이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춘성(春城)이 서울 삼청동에 이 절의 부속암자를 만들었다. 그 뒤 퇴락하여 폐허가 된 것을 1958년에 비구니 법운(法雲)이 중수하였고, 1967년에는 혜성(慧星)이 삼성각을 신축하였으며, 1969년 4월에는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74년 완전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성남 봉국사 대광명전은 주존불(主尊佛)로 목조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좌우협시 보살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경내에 남향하여 정면3칸, 측면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풍판(風板)이 있으며 건물에 비해 지붕이 커, 그 외관이 장중하다. 자연석 기단에 놓인 고복형(鼓腹形)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공포가 결구되고 오량(五樑)의 지붕가구가 올려져있다. 장식은 쇠서의 형태, 연봉 및 봉황 조각 등 18세기 말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원래의 지붕은 측면의 공포배열과 귀공포 형태로 미루어 팔작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좌우에는 사자를 닮은 서수(瑞獸)가 있어 특이하다. 이 불전은 기단과 초석, 지붕 등 많은 부분이 수리되었으나, 조선후기의 불전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성남 봉국사 대광명전은 1980년 6월 2일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가 2022년 12월 28일 보물로 승격되었다.
제2로 직봉 성남-천림산 봉수 유적은 현재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35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봉수의 형태는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으로 전체 면적은 333m², 둘레는 80m이며, 동서의 길이는 33.6m, 남북의 길이는 12m이다. 그 중 북쪽 방화벽의 길이는 30m이고 동쪽 방화벽은 16m이며, 남쪽 방화벽은 29.3m이다. 조선 초기 봉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천림산 봉수는 현존하는 봉수 중 규모가 가장 크며, 구조적으로 가장 완벽한 5개조 연조와 방화벽 및 담장지 등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 5로거 봉수노선 중 2로거 내지봉수의 직봉으로 용인 석성산 봉수(이격 거리 18.75km)에서 신호를 받아 서울 목멱산(현 남산) 봉수(이격 거리 16km)에 신호를 전달하는 경기도 관내의 마지막 봉수이다.
천림산 봉수의 명칭은 穿川山(천천산), 穿川峴(천천현), 月川峴(월천현), 天臨山(천림산) 봉수 등으로 4차례 변천되었다. 한편, 천림산 봉수군의 근무 인원과 관련하여서는 『중정 남한지(重訂 南漢誌)』(1846년) 봉수조에 봉군(烽軍) 25명, 봉군보(烽軍保) 75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여타 다른 봉수와 같이 봉군 5명이 조를 이루어 5교대로 월 평균 6일씩 근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봉군보 75명은 실제 근무를 하지 않는 대신 근무를 서는 봉군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봉군 1인당 봉군보 3인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봉수제도는 전신 전화 도입과 함께 1894(고종 31)년 폐지되었다.
제2로 직봉-성남 천림산 봉수 유적은 2002년 9월 16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23년 1월 10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망경암 우측의 자연 암벽 상단에 작은 장방형의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안에 부조(浮彫)한 불상으로, 이 주위 14군데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 이곳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임금이 친히 거동하여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한 장소이며,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平原大君, 1427~1445)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의 명복을 빌기 위해 칠성단(七星壇)을 세워 칠성제를 지내면서 ‘칠성대(七星臺)’라 불렸다. 불상 주변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1897(광무 1)년에 이규승(李圭承)이 관음상을 새기고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좌상으로 양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는 민머리를 하고 있는데 얼굴 모습은 마모가 심하여 그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마애여래좌상 우측과 아래로는 암벽을 평평하게 다듬은 후 14곳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 등의 명문을 새겨놓았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조형미나 조각 기법이 그다지 우수하지는 않지만,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선 후기 불상 중 하나이며, 또한 당시의 칠성 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성남 봉국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경기도 성남시 영장산에 있는 오래된 사찰인 성남 봉국사의 대광명전(보물)에 관음보살, 지장보살과 함께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높이가 112cm인 중·대형 불상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 하고 손 모양은 통인(通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나발(螺髮)이 있고, 정수리에는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髻)가 있다. 이마 위에는 반원형의 중앙 계주(髻珠)가, 정수리 부위에는 낮은 원기둥 모양의 정상 계주가 장식되어 있다. 네모난 얼굴에 가늘게 뜬 눈, 원기둥 형태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은 17세기 전반 불상의 전형적인 인상과 같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완만한 곡선으로 새겨져 있어 1600년부터 1630년대에 제작된 불상의 표현과 유사하다. 불상의 얼굴에 비하여 신체가 크지만 얼굴과 신체 비율은 인체의 비율보다 균형 잡혀 있다.
불상은 대의(大衣) 안쪽에 편삼(褊衫)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의 옷자락이 가슴까지 수직으로 늘어져 옆으로 펼쳐져 있다. 또한 나머지 대의 자락은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 있고, 하반신을 덮은 대의 자락은 복부에서 수직으로 늘어져 있으며 끝부분은 역삼각형 모양이다. 불상의 옆면은 한 가닥의 옷 주름이 어깨선을 따라 수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불상 뒷면의 목둘레에는 대의 끝단이 둘러져 있고, 왼쪽 어깨에는 앞에서 넘어온 옷자락이 대좌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가슴을 덮은 승각기(僧却崎)는 수평으로 묶여 있으며 윗부분은 연꽃잎 모양으로 접혀 있다.
불상의 안쪽에 조성 발원문을 비롯한 복장 유물이 없어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와 작가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으나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으로 볼 때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조각승 수연이나 그 계보를 잇는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성남 봉국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시대성, 희귀성, 예술성, 보존 상태의 측면에서 조선 후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대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성남 봉국사 아미타불회도는 현재 주불전인 대광명전의 후불도(後佛圖)로 걸려 있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1873년에 삼각산 흥천사에서 제작하여 영장산 봉국사에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가로 216.5cmm, 세로 176cm이며 가장자리는 흰색과 청색으로 꾸몄다. 이처럼 주불전 후불도가 가로로 길어지고 가장자리를 청색으로 마감하는 방식은 19세기 후반 불화의 특징이다.
불화의 중앙에는 설법인(說法印)의 손 모양을 한 아미타불이 불단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여래 좌우로 6위의 보살이 있다. 이 중 존명을 알 수 있는 보살은 민머리에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뿐이며, 그 외에는 존상의 형상이 명확하지 않아 존명을 단언하기 어렵다. 이처럼 불화에서 주존 혹은 협시 보살의 모습이 모호해지는 경향은 19세기 불화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우 화기는 봉안 위치와 의례적 용도만을 의미하는 상단탱으로 기록되며, 이 아미타불회도 역시 화기에 상단탱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편, 아미타불의 광배(光背) 뒤로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있으며, 그 옆으로 10대 제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경전을 보거나 호랑이와 과일을 들고 있다. 불화의 상단 및 하단에는 부처를 수호하는 호법신, 즉 검, 비파, 용과 여의주, 탑과 당을 든 사천왕과 사자관, 코끼리관을 쓴 야차와 건달바가 있다. 여래와 나한은 얼굴이 타원형이고, 눈을 가늘게 떴으며 코가 길고 입은 작은데, 이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서울·경기권에서 유행하던 화풍이다. 이에 반해 보살과 사천왕 등은 얼굴이 둥글고 눈이 커서 19세기 후반의 화풍도 나타난다. 즉, 봉국사 아미타불회도는 19세기 전반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1870년부터 새롭게 선호되었던 화풍을 수용하고 있으므로 19세기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화풍이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주존인 아미타불의 신광(身光)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어 화려하며, 불화의 주된 색인 붉은색과 녹색이 각 존상의 광배와 의복에 칠해져 있다. 또 19세기 후반에 모든 불화에 사용되었던 채도와 명도가 높은 청색, 소위 코발트블루가 사용되었으며 보조색으로 황토색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황토색 바탕에 흰 연꽃이 그려진 탁의(卓衣)에는 당시의 대표적인 표현 기법이 나타난다.
이 불화는 화승 덕운긍윤이 책임을 맡아 제작한 유일한 불화로서 화면 구성이 안정되고 존상 묘사가 뛰어나며 세부 묘사가 정교하여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경기도 불화 중에서도 수준이 높다. 또한 독특한 인물 묘사 및 색채 사용 등에서 19세기 후반 경기 지방의 지역색이 드러난다.
이처럼 봉국사 아미타불회도는 19세기 후반 경기도에서 제작된 불화 중 구성 및 표현 등이 우수하여 시대성, 희귀성, 예술성, 보존 상태의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성남 약사사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 삼존(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중심으로 십왕(十王)을 비롯하여 판관·사자·옥졸·장군 등의 권속을 배치한 불화로서, 1880년 경기도 고양군의 화양사(현 서울 광진구 영화사로 91)의 중단탱으로 봉안되었던 불화이다.
성남 약사사 지장시왕도에서처럼 병풍을 배경으로 하여 지장삼존을 중심으로 주변에 여러 단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시왕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등의 구성은 서울 경기지역에서 성행한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이다.
아울러 우두・마두신(牛頭・馬頭神)과 십왕이 들고 있는 홀 등에 강조하고자 하는 문양 등에 호분(胡粉)을 쌓아 올려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고분법(高粉法)이 시행되어 있는 점도 18세기 이후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불화 하단의 붉은색 종이에 적혀 있는 화기(畵記)에는 당시 궁궐의 상궁등의 시주로 봉안될 수 있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실려있으며 다른 불화 화기에서는 아직껏 찾아 볼 수 없었던 화승의 소임을 책임 수화승인 ‘어화편수(魚畵片手)’, 표구 담당 화승인 ‘장회(莊繪)’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당시 불화승 소임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 또한 크다.
성남 ‘법륜사’ 명 신중도 및 복장물은 조선 왕실 종친 이규승(李奎承)의 시주로 1889년(고종26)에 제작되어 법륜사에 봉안한 불화이다.
신중도 화면 상단에는 천상의 세계를 표현한 제석천과 범천이 자리하고 있고 중앙부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 동자와 천동ㆍ천녀,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민간 신앙의 산신과 도교신인 조왕신이 호위하고 있다. 양쪽으로 거의 대칭을 이루며 일ㆍ월궁천자와 용왕을 비롯한 호법 신장들이 좌우로 각각 다섯씩 배치되어 있다.
하단에 쓰여진 화기에는 제작시기와 봉안사찰, 시주자, 화원이 기록되어 있다.
신중도 뒷면에서 발견된 복장물은 종이로 만든 직사각형의 후령통을 황초폭자(黃綃幅子)가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후령통은 발원문과 오색사, 오보병, 흰 종이에 붉은 글씨로 쓰인 진언문 등으로 되어 있다.
이 불화는 법륜사의 실재를 증명해 줄 수 있으며, 구성 및 도안을 통하여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기 지역 신중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복장물은 봉인체제와 발원문 양식, 후령통의 구성측면에서 불화 복장품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성남 ‘법륜사’ 명 감로도는 조선 왕실 종친 이규승(李奎承)의 시주로 1889년(고종26)에 제작되어 법륜사에 봉안한 불화이다.
감로도의 화면 상단에는 나란히 서 있는 칠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아미타삼존과 왕후장상, 선왕선후, 천둥과 번개를 일으키는 뇌신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 등이 있다. 중앙에는 감로를 마신 중생들을 작법승(作法僧)이 극락세계로 천도한다는 내용이 표현되어 있는데 왕실과 백성, 조상을 영가천도하고 나라의 안정을 기원하는 제단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하단에는 한 쌍의 아귀가 마주 보고 있는데, 아귀의 좌우로는 세속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장례, 영가천도 등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어 수륙화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화기에는 제작시기와 봉안사찰, 시주자, 화원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불화는 법륜사의 실재를 증명해 줄 수 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 감로도의 전형을 파악할 수 있고 왕실 구복을 위한 제의가 행해졌던 경기지역 왕실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가치가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숙공 이수(李晬, 1569~1645)는 인조대의 종친(宗親)으로 자는 명원(明遠)이며,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 1524~1581)의 손자이자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 1538~1611)의 아들이다.
학문이 뛰어나 1583(선조 16)년 15세 나이로 부정(副正)에 봉해졌고, 임진왜란 때에는 선전관(宣傳官)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원록(璿源錄)의 편수(編修)에 참여하였으며 1613(광해군 5)년 귀천군(龜川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617(광해군 9)년 전라남도 순천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하게 되었다. 1624(인조 2)년에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우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당시에도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올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정1품 벼슬만 기록할 수 있는 현록대부(顯錄大夫)에 오르기도 했다.
이수선생 묘는 부인 정씨와의 합장묘이고, 조성된 봉분 아랫부분에는 각각 팔각 호석을 설치하여 봉토의 유실을 방지하였다. 그 좌우에는 망주석(높이 172㎝)과 문인석(높이 172㎝)이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또한 묘역에는 상석(31X98X162㎝)과 혼유석, 향로석(높이 36㎝)이 있다. 고석 대신 방형의 석재 2개로 상석을 받치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며, 망주석에는 염의(簾衣)와 운각(雲角)을 장식하였다.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한 문인석은 안정적인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으나, 홀을 쥐고 있는 양손이 미숙하게 표현되었다. 봉분 사이에는 묘갈(높이 174㎝)이 세워져 있다.
비신(67X21X150㎝)과 하단이 마멸되었으나 전면의 대자(大字)를 통해 묘에 묻힌 사람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삼면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이 지은 묘갈문을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기록하였으나 마모가 심한 상태이고 건립 연대 역시 미상이다. 묘역 아래의 신도비(높이 279㎝)의 비문은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가 찬하여 전해지다가 1897(광무 1)년에 비로소 10세손 부호군(副護軍) 이승휘(李承徽)가 비신 앞뒤에 글씨를 쓰고, 9세손 이봉현(李奉鉉)이 전액(篆額)을 올려 완공하였다. 비문의 말미에는 12세손 이장섭(李章燮)이 건립 과정을 서술한 추기(追記)를 새겨 놓았다. 또한 개석에는 팔작지붕을 얹었고, 방부에는 안상(眼象)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은 인조에서 효종, 현종의 3대에 걸쳐 나라에 공헌한 재상이었다. 본관은 전주, 자는 상보(尙輔), 호는 쌍계(雙磎) 또는 백헌(白軒)이다. 아버지는 유간(惟侃)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 대호군 고한량(高漢良)의 딸이다.
이경석은 1613(광해군 5)년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되었다. 1623(인조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체찰사 장면(張晩)의 종사관으로서 강원도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대사헌, 부제학으로서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이듬해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찬진(撰進)하였다. 1642(인조 20)년 심양에서 돌아와 대사헌, 좌의정 등을 거쳐 1649(효종 1)년에 영의정에 올라 효종의 북벌정책에 참여하였다. 1668(현종 9)년에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와 관련한 사궤장과
<사궤장연회도첩>
이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제930호로 지정되었다. 이경석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성남의 판교로 옮겨 살다가, 뒤에 지금의 석운동에서 만년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등 유집 50여 권이 있다.
그의 묘는 부인 전주유씨와 합장묘이며, 2단의 사성으로 후면을 정리하였고 봉분 앞에는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조성하였다. 봉분 좌우에는 망주석과 금관조복형(金冠朝服形) 문인석이 각 1쌍씩 서 있다. 망주석은 8각으로 극히 화려하며 석수 조각이 양각되어 있다. 봉분 중앙에 혼유석, 상석과 계체석, 4각과 6각의 향로석 2기, 장명등이 있으며, 봉분 우측에 상석과 4각 향로석 등 다수의 석물이 있다. 신도비의 규모는 총 높이 475cm, 비 높이 259cm, 너비 84cm, 두께 40cm이다.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이광사가 쓰고 전액을 하였으며 1754(영조 30)년에 건립되었으나,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모되어 1975년 개수하였다. 묘갈은 1751(영조 27)년에 건립되었는데, 갈문은 현손 광회와 광사가 각각 짓고 썼다. 비의 규모는 53X22X162cm이다.
한산이씨 묘역은 성남시 수내동 중앙공원 내에 편입되어 있다. 묘역은 조선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해발 약 70m의 영장산(靈長山) 일대에 조성되었는데, 전체 규모는 약 287,000㎡에 이른다. 정남향 묘역에는 토정 이지함의 조부로 봉화현감을 지낸 한원군 이장윤(李長潤, 1455~1528)의 묘를 비롯하여 한성군 이질, 한평군 이지숙, 아천군 이증(李增, 1525∼1600)의 묘가 위치해 있고, 동남향에는 아천군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 병조좌랑 이경류(李慶流, 1564~1592)와 정부인 횡성조씨, 그의 애마총, 김제군수 이정룡(李廷龍, 1629~1689)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역 아래에는 의간공(懿簡公) 이증의 부조묘(不祧廟)가 건립되어 있으며, 중앙공원 탄천변의 비각에는 1715(숙종 41)년 세워진 이증 신도비와 1728(영조 4)년에 세워진 이정룡 신도비가 있다. 그 옆에는 이경류의 충신정려문(忠臣旌閭門)과 1728(영조 4)년에 건립한 한산이씨삼세유사비(韓山李氏三世遺事碑)가 나란히 서 있다. 이중 삼세유사비의 비문은 1722(경종 2)년 후손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지었고, 규모는 80X26X198cm이다.
또한 세장묘역 내에는 현풍현감 이확(李穫, 1583~1658)의 사위인 홍수원(洪晬元, 1611~1637)의 묘가 있는데, 이는 처가의 선산에도 매장될 수 있었던 당시의 풍습을 엿볼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상주에서 순절한 병조좌랑 이경류의 말 무덤 같은 이색적인 유적도 있다. 한편 세장 묘역의 외곽에는 경계 표시를 위한 한산이씨입수비(韓山李氏入首碑) 1기와 ‘한산이씨세장지산(韓山李氏世葬之山)’이라 쓰여 진 표석 2기를 세워 놓았다. 이 역시 다른 세장 묘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이다.
한산이씨 묘역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사대부의 세장 묘역이라 평가된다. 경기도에서는 분당 신도시 개발 당시인 1989년 한산이씨 묘역의 보존을 결정하고, 경기경기도 기념물로 일괄 지정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여 보존하고 있다.
전주이씨 태안군파 묘역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 이팽수(李彭壽, 1520~미상)와 그의 아들 이강(李橿, 1551~1585), 증손인 이경인(李敬仁, 1575~1642)과 생몰년 미상의 이석명 등 4기의 묘소가 있다.
묘역은 전주이씨 태안군파가 조선 전·후기에 세거하였던 정자동 불곡산(佛谷山) 자락의 구릉에 위치한다. 이팽수 묘는 원래 분당구 정자동 산11-1에 있었으나 분당 신도시 개발로 인해 1991년 발굴 조사를 거쳐 정자동 34-4(황새울로132번길 32)로 이장하였다. 아래에 아들 이강 묘가 있다. 이경인 묘는 정자동 산 33-1에 위치하고 있다. 묘향(墓向)은 각 묘소가 안장되어 있는 지형에 따라 정서향, 남서향, 서향을 하고 있다.
태안군 이팽수는 성종의 제12남인 무산군의 다섯째 아들로 임진왜란 때 왕을 호위한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그의 묘는 부인 안산김씨(安山金氏)와의 합장묘로 쌍분이다. 쌍분의 중앙 앞에 월두형(月頭形)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의 좌·우에는 문인석이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1597년(선조 30)에 건립되었다. 묘표의 규모는 비신이 69X18X154cm, 기태가 85X53X34cm이다. 쌍분 모두 회곽묘(灰槨墓)에 외관 및 내관을 사용한 이중관의 구조였으며, 태안군의 묘에서 백자 명기 10점과 부인의 묘에서 청화백자 묘지석 7매, 백자 명기 2점이 출토되었다.
이강 묘는 특이하게 뚜렷한 봉분의 흔적은 없으나,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 각 한 쌍 등 다수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태안군의 증손 이경인은 이천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묘는 단분으로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으며, 묘역 전방에는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배열되어 있다. 상석과 향로석은 화강암으로 142X80X30cm 규모이며 망주석은 120cm이다. 문인석은 대리석재로 30X24X115cm이다. 묘갈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규모는 비신이 45X15X128cm, 기태가 79X57X20cm이며, 기태의 평면에는 연화문이 측면에는 안상문이 조식되어 있다. 묘갈은 삼면비로 그의 선계와 관력이 명기되어 있는데, 지은이와 글쓴이는 마모로 인하여 알 수 없다. 묘비는 1696(숙종 22)년에 건립되었고, 3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마모가 심하다.
묘역의 석물은 대부분 원래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그 형태는 특별히 화려하거나 번잡함 없이 단순한 편이다. 이 중 금석문을 대표하는 묘갈과 묘표는 전체 4기의 묘소가 모두 비좌와 비신 월두 형태이다. 공통적으로 비문을 짓고 쓴 찬자와 서자가 명확하지 않다.
이집(李集, 1327~1387)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성노(成老), 호연(浩然), 호는 묵암자(墨岩子), 둔촌(遁村)이다. 이당(李唐)의 아들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했다. 1347(충목왕 3)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1368(공민왕 17)년 신돈의 비행을 비판하고 장차 화가 미칠 것을 예견해 아버지를 업고 도망하여 영천(永川)에서 은거하였다. 1371(공민왕 20)년 신돈이 역모로 주살 된 후, 옛집인 송경(松京)의 수양산(龍首山) 아래 현화리(玄化里)에 돌아왔다.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령현(川寧縣)에서 독서와 농경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때 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한 질문서를 보내 당시의 문사(文士)들을 경탄케 하였다. 1669(현종 10)년에 건립한 광주(강동구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岩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유고로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둔촌 이집 묘역은 부인 정화택주 영주황씨와의 원형 합장묘이다. 용미와 활개를 갖춘 봉분의 높이는 1.8m, 지름은 6.6m이다. 석물로는 봉분 중앙에 혼유석, 상석, 사각 향로석, 장명등이 있고, 상석 좌·우에 소형 망주석, 문인석 한 쌍 외에 차양석 네 개와 이단의 계체석 및 봉분 좌·우측 신구 묘표가 각 1기씩 서향하고 있다. 이 중 묘표는 백색 화강암제의 비좌와 비신 월두형이다. 비신 전후(前後) 두 면의 비문은 11대손 이휴징(李休徵, 1607~1677)이 지었다. 장명등에는 화창공과 사모 지붕에 연봉 장식이 있다.
둔촌 이집 묘역은 1993년 8월 2일 성남시 향토유산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5월 26일 경기경기도 기념물로 승격되었다.
수내동 가옥은 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 이곳에 세거하였던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살림집 중 한 채로 이택구가 거주하였던 집이다.
과거 수내동 지역은 선산 안쪽에 약 70호 가량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중 한산이씨는 30여 호 가량 되는 집성촌이었다.
현재는 분당지구 개발로 인하여 철거되고 이 집만 남았다.
이 가옥의 정확한 건립 연대 및 연혁은 파악할 수 없으나 이 가옥에 살았던 이택구씨의 증조부가 이곳으로 이사한 후 4대째 거주한 것으로 미루어 대략 150-200년 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집 주위에는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와 연못, 정자터 등이 보존되어 있다.
집의 형태는 바깥마당에 면한 一자형 행랑채와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고 안채 뒤로는 널찍한 뒷마당이 흙담에 둘러싸여 있다.
전체적으로는 튼 口자형을 이루는 전형적인 중부지방형의 배치 구조이다.
안채는 10칸 규모의 초가로서 건넌방과 대청, 안방이 일렬로 배치되고 안방 앞쪽에 꺾이어 부엌과 광이 1칸씩 있다.
낮은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오량(五梁)의 지붕가구를 짜 올렸는데 부재가 비교적 견실하며 치목(治木)도 반듯하여 19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된다.
문간채는 6칸 규모의 우진각 초가인데 중앙에 대문이 있고 오른쪽에 온돌방이 위치하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경기지역 살림집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
분당구 율동 도랫말에 관찰사 한혜(韓惠, 1403~1431)의 아들 문정공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후손이 최초로 정착하였다.
한계희의 묘를 분당저수지 위쪽에 쓰고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고 그 후손이 세거하면서 ‘한씨촌’을 형성하였다.
한계희는 조선 초 기내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 시호는 문정이다.
우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특히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최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47(성종 8)년 『의방유취(醫方類聚)』 간행을 주관하였다.
그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한사문(韓士文, 1446~1507)은 시호는 공간이며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서천군에 봉해졌고, 한사무(韓士武, 1452~1482)는 한성판관, 한사신(韓士信)은 삼등현령, 한사개(韓士介, 1453~1521)는 시호가 영흥이며 영흥부사와 해주, 광주, 진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한사무의 아들 한승원(韓承元)은 정선군수, 한승형(韓承亨)은 성주목사, 한승정(韓承貞)은 대사간, 한승인(韓承仁)은 호군, 한승의(韓承義)는 처사였다.
분당구 율동에는 주로 한사신의 차남 도정공 한석(韓碩, 1479~?)의 후손이 많은데, 한석은 훈련원도정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아들 한인원(韓仁源)은 동북현감, 한예원(韓禮源)은 감찰, 한지원(韓智源)은 교리를 역임하였다.
한지원의 아들 한술(韓術)은 참판, 한회(韓懷)는 승지였다.
충성공파 후손인 한순흠(韓淳欽, 1933~)의 19대조로 호조참의와 승정원 부정자를 지낸 한욱(韓勖)의 장남 한귀영(韓貴榮)은 어모장군, 차남 한귀익(韓貴益)은 용양위부사가 되고, 한귀익의 아들 한진선(韓振善)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한계희 신도비의 건립 연대는 1483(성종 14)년으로 조선 초의 전형적 양식으로 화관석, 비신, 기대로 이루어져있다.
화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규모는 화관석 72X23X52cm이고 비신 61×18×152cm, 기대 115×59×44cm이다.
신도비문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찬하고 안침(安琛, 1445~1515)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사문의 신도비는 총고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전‧후면에는 각각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는 안상문을, 상부에는 연당초문을 조각하였다.
1508(중종 3)년에 세웠으며 신용개(申用漑, 1463∼1519)가 찬하였고 신흠(申欽, 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사개의 신도비 총고는 206.5㎝이고 전면에는 운문, 상단 중앙부에는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찬 하였으며 1521(중종 16)년에 건립하였다.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 1538~1611)은 중종(中宗)의 손자이며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 1524~1581)의 장남이다.
1581년 덕양군이 돌아가자 관례에 따라 정경(正卿)의 품계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당시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1607년 종1품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제수되고 1610년에는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올라 왕실 종친부의 일을 관장하였고 사옹원제조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일반 사대부의 봉분이 통상 열두 폭의 병풍석을 두르고 문인석에 오량관(五粱冠)을 씌운 반면, 풍산군의 봉분은 큰 받침돌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팔 폭의 병풍석을 둘렀으며 문인석에도 칠량관(七粱冠)을 씌우는 등 왕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왕의 예에 따라 매장한 특징이 있다.
담당부서 : 교육문화체육국 > 문화관광과 > 종무팀
문의 : 031-729-3478~9현재 페이지의 내용과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만족도 조사결과는 서비스 개선을 위한 자료로만 활용되오니, 답변을 원하시는 민원글은 성남시에바란다 또는 민원상담코너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